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문단 편집) == 생애 == 레오나르도 "피에로"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3시경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부모인 변호사 아버지 안토니오 피에로와 농민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아들이었다. 처음 태어나서는 어머니의 집에 살다 대여섯이 돼서 아버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레오나르도를 돌봐준 것은 아버지보다는 숙부였고 숙부는 어린 레오나르도에게 자연과 세상을 조금씩 가르쳐주었다. 어머니 카테리나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소작농의 딸로 [[체르케스인]] 출신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https://m.yna.co.kr/view/AKR20230315035800009?section=international/all|#]][[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485444?sid=104|#]] 아버지가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인식한 뒤, 레오나르도는 14살쯤 [[피렌체]]로 이사를 가 안토니오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공방]]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20살이 되어 베로키오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수로 참여해 꼬마 천사 두명을 맡았는데, 당시에 일반적이던 템페라 기법에 새로 알려지기 시작한 [[유화(미술)|유화]]를 같이 실험해서 그렸다. 세간에는 베로키오가 그걸 보고 현타가 찾아와 화가를 은퇴했다는 [[야사(역사)|야사]]가 전해지지만, 이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베로키오는 그 뒤에도 잘만 작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그림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베로키오는 다빈치를 정식으로 화가 [[길드]]였던 성 루카 조합에 가입시켜주게 했다. 30살이 된 1482년 다 빈치는 [[밀라노 공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밀라노 공이었던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다빈치를 지원하면서, 다 빈치는 여러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기마상> 등이 이때 만들어졌고[* 다만 이 기마상은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프랑스]] 군사들이 활쏘기 과녁으로 삼아서 마구 [[석궁]]의 화살을 쏘아대는 바람에 커다란 고슴도치로 변해버려, 결국 완성되지 못하고 버려졌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건 <[[최후의 만찬]]>이다.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나면서 1499년에 [[프랑스 왕국]]의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점령하고 루도비코는 프랑스에 투옥되며 밀라노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다 빈치는 잠시 [[베네치아]]에서 일을 하다가 1500년 피렌체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1501년 <성 모자와 성 안나> 제단화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연구 스케치와 관찰을 남겼다. 헬리콥터나 인체비례도 등 잘 알려진 다빈치의 과학자/기술자적 면모는 이 때의 스케치로 알게 된 것. 1503년에 피렌체 시청에 벽화작업을 의뢰받아 <앙기아리 전투> 작업을 시작했는데, 재밌는 건 옆편 벽에서 라이벌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작업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1503년에는 그 유명한 [[모나리자]] 작업을 시작해 죽을 때까지 그림을 손에 놓지 않는다. 1506년에는 루이 12세의 요청을 받고 다시 밀라노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밀라노를 떠나는 1513년까지 다빈치는 다양한 작업과 연구를 하면서 지냈는데, 제3차 [[이탈리아 전쟁]]으로 1512년 교황이 밀라노를 공격하고 프랑스는 물러난다. 그렇게 프랑스가 떠나면서 다 빈치는 교황령의 [[로마]]로 가서 교황청 작업을 주로 하게 되었지만 완성작 없이 취소되었고,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 루아르 강의 앙부아즈 궁에 기거하게 되고, 여기서 <모나리자>가 완성된다. 그러나 말년에 가면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어 그가 좋아하던 작업은 할수없게 되었으며 소일거리만 하게 되었다. 결국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 그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1519년 5월 2일 프랑스의 클로 뤼세(Clos Lucé)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레오나르도는 독신인터라 그가 자식처럼 아낀 제자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 레오나르도와는 스승과 제자보다는 부모와 자식 같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특히 프란세스코는 레오나르도의 곁에 항상 있었고 임종도 함께 해줄 정도였다.]가 모든 재산을 상속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